20세기 영국 교회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마틴 로이드존스다. 그는 본래 촉망받는 의사였다. 런던의 저명한 병원에서 일하며 의학계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내려놓았다.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일보다 영혼을 고치는 일에 부름받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의사 가운을 벗고 강단에 선 이 결단이 영국 복음주의의 한 시대를 열었다. 로이드존스는 1939년부터 약 30년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했다. 그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강해 설교다. 강해 설교란 성경의 한 본문을 깊이 파고들어 그 본문이
이준혁 · 2026-05-31
기독교 역사에서 한 사람만 꼽으라면 많은 신학자가 주저 없이 그를 든다. 히포의 어거스틴이다. 4세기에서 5세기를 살아간 이 북아프리카의 신학자는 종교개혁가들이 끊임없이 돌아간 샘이었다. 칼뱅과 루터 모두 자신을 어거스틴의 후예로 여겼다.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만나는 인물이 바로 그다. 어거스틴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고, 진리를 찾아 여러 사상을 전전했다. 한때는 마니교라는 이원론적 종교에 빠졌고, 수사학자로 명성을 좇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의 영혼을 채
유찬호 · 2026-05-31
한국 교회의 청소년·청년 집회를 둘러싼 논의는 대개 무대 위를 향한다. 음악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조명과 연출이 감정을 조작한다, 찬양이 가벼워졌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과녁을 비껴간다. 무대 위의 현상은 결과일 뿐이다. 진짜 물음은 그 무대를 기획하고 세운 사람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 집회를 설계한 사역자는 무엇을 위해, 어떤 신학적 확신 위에서 그것을 만들었는가. 다음세대 사역의 위기는 문화의 위기가 아니라 그 문화를 다루는 사역자의 철학의 위기다. 먼저 사역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의 가장 강한 논리를 들어 보자. 현장
박서연 · 2026-05-31
한국 교회의 선교 지형이 흔들리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의 대표적 선교사 파송국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파송 인력은 정체되고 고령화되는 한편, 한국 사회 안에서는 도리어 복음을 들어야 할 영역이 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보내는 교회였던 한국이 다시 보냄받아야 할 땅으로 거론되는 역설이다. 수치가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국내 주요 선교 단체들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파송 선교사 수는 한동안 가파르게 늘다가 근래 증가세가 멈췄고, 신규 헌신자보다 은퇴·귀국 선교사가 많아지는 시점에 다가서고 있다. 정확한 연도별
이준혁 · 2026-05-31
복음주의라는 말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특정 정치 성향을 가리키는 표지이고, 어떤 이에게는 현대적 찬양과 자유로운 예배 형식을 뜻하며, 또 어떤 이에게는 대형교회의 성장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한 단어가 이렇게 여러 갈래로 쓰일 때, 그 단어의 본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어원은 단순하다. 헬라어 유앙겔리온(euangelion), 곧 복음, 좋은 소식이다. 종교개혁 시기 이 말은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맞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이들을 가리켰다. 18
박서연 · 2026-05-31
투표소로 향하는 길에 한 가지 풍경을 떠올려 보자. 같은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던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파란색을, 다른 사람은 빨간색을 지지한다. 한때 그들은 같은 식탁에서 떡을 떼던 형제였다. 그러나 지금 둘은 서로를 견디지 못한다. 한쪽 눈에 다른 쪽은 나라를 망치는 세력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같은데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가 적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적지 않은 풍경이다. 이런 시대에 가장 그럴듯하게 들리는 조언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히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중립
유찬호 · 2026-05-31
교계 정치라는 말에는 부정적 어감이 따라붙는다. 총회장 선거를 둘러싼 금품 시비, 교단 분열, 자리다툼 같은 장면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 자체는 정치다. 누가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가, 어떤 결의를 채택하는가, 분쟁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 모든 것이 공동체가 함께 결정하는 일이며, 함께 결정하는 일에는 언제나 절차와 권한과 합의가 따른다. 장로교의 치리 구조가 대표적이다. 당회, 노회, 총회로 이어지는 회의체는 한 사람의 독단을 막고 여러 사람의 분별을 모으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종교개혁 이후
이준혁 · 2026-05-31
선거철이 되면 교회는 곤혹스러운 자리에 선다. 강단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치는 교회 밖의 일이니 침묵해야 하는가. 한국 교회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오래 흔들려 왔다. 어떤 교회는 강단을 정치 집회처럼 만들었고, 어떤 교회는 모든 사회적 발언을 회피했다. 두 태도 모두 그리스도인의 시민적 책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교회는 어느 정당, 어느 후보를 지지하라고 말하는 기관이 아니다. 강단이 특정 진영의 확성기가 되는 순간 복음은 정파의 도구로 좁혀진다. 같은 신앙을 고백
최다은 · 2026-05-31
새벽, 한 사람이 화면 앞에 앉는다. 풀리지 않는 물음을 입력한다. 몇 초 만에 매끄러운 답이 돌아온다. 출처가 정리되고, 논점이 가지런하며, 문장은 흠잡을 데 없다. TGC는 바로 이 장면을 향해 "AI를 사용하기 전에 전도서를 읽으라"는 글을 실었다. 제목은 도발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단은 오래되고 깊다. AI를 향한 기대를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인류는 언제나 도구를 만들어 자기 한계를 넘어 왔다. 문자가 기억의 한계를 넘었고, 인쇄가 지식의 독점을 깼으며, 검색이 정보의 문턱을 낮췄다. AI는 그 계보의 가장 최근 항목
유찬호 · 2026-05-31
자녀에게 신앙을 무엇으로 가르치는가. 많은 부모가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린다. 주일학교에 맡기면 된다고 여기지만, 정작 가정의 식탁에서 신앙은 좀처럼 입에 오르지 않는다. 교회는 예배에 익숙한 세대를 길러냈으나, 자기 신앙을 말로 설명할 줄 아는 세대를 길러내지는 못했다. 신앙 전수의 위기는 열심의 부족이 아니라 형식의 상실에서 온다. 교회는 이 문제를 수백 년 동안 하나의 형식으로 풀어왔다. 질문하고 답하는 교리문답(catechism)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1542년 요리문답을 펴냈다. 독일 팔츠 지방에서는 1563년 하이델베
정한결 · 202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