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청년이 줄고 있다. 주일 예배당에서 청년의 자리가 비어 가고, 청년부가 사라진 교회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러나 청년이 떠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왜 떠나는가이다. 이유를 잘못 짚으면 처방도 빗나간다. 흔한 진단은 청년의 신앙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세속 문화에 물들고 편안함을 좇다 보니 교회를 등졌다는 설명이다. 이 진단에는 일부 사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떠난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아 보면 그림은 더 복잡하다. 많은 경우 그들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실망한 것이다. 말과 삶이 다
최다은 · 2026-05-31
AI가 앗아 가는 것은 인간의 일자리가 아니다. 인간이 왜 일하는가, 더 깊게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복음연합(TGC)에 실린 한 고백이 그 단면을 보여 준다. 한 대학생이 한 학기 내내 AI로 과제를 베끼고 수고를 건너뛴 일을 털어놓는다. 편리했고 주변 대부분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이 포기한 것은 한 과목의 성적이 아니라 스스로를 빚어 가는 수고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학생의 문제도, 한 세대의 문제도 아니다. AI가 과제를 처리하고 코드를 짜고 글을 대신 써 주는 세계에서 사람은
유찬호 · 2026-05-31
신앙생활을 조금만 깊이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물음에 걸려 넘어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 내가 기도하고 선택하고 애쓰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전도하고 결단을 촉구하는 일은 헛수고가 아닌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 오래된 긴장은 신학 교과서의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무릎 앞에 놓인 실제 물음이다. 성경은 두 진리를 동시에 가르친다. 한편으로 구원의 모든 단계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그분에 의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 믿으
박서연 · 2026-05-31
교회 안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우리 교회는 개혁주의라는 말, 저 목사는 복음주의 노선이라는 말,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른다는 말이다. 익숙하게 오가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말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 어떻게 다른지 물으면 답이 흐릿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이름들을 들으면서도 그 내용을 붙들지 못한 채 분위기로만 받아들인다. 이름을 안다는 것과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를 안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먼저 이 구별을 사소하게 여기는 시선이 있다.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면 됐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따지는 일이 무슨 의미가
유찬호 · 2026-05-31
신학자라고 하면 서재에 파묻혀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깊은 신학을 평범한 신자의 손에 쥐여 준 사람이 있다. 영국 출신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다. 그의 이름은 낯설어도 그의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은 한국 교회에서도 오래 사랑받아 온 책이다. 패커는 깊은 신학과 보통 신자의 삶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이었다. 패커의 생애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가 학문적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평신도를 위한 글을 평생 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청교도 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였다. 17세기 영국 청교도들
최다은 · 2026-05-31
20세기 영국 교회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마틴 로이드존스다. 그는 본래 촉망받는 의사였다. 런던의 저명한 병원에서 일하며 의학계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내려놓았다.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일보다 영혼을 고치는 일에 부름받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의사 가운을 벗고 강단에 선 이 결단이 영국 복음주의의 한 시대를 열었다. 로이드존스는 1939년부터 약 30년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했다. 그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강해 설교다. 강해 설교란 성경의 한 본문을 깊이 파고들어 그 본문이
이준혁 · 2026-05-31
기독교 역사에서 한 사람만 꼽으라면 많은 신학자가 주저 없이 그를 든다. 히포의 어거스틴이다. 4세기에서 5세기를 살아간 이 북아프리카의 신학자는 종교개혁가들이 끊임없이 돌아간 샘이었다. 칼뱅과 루터 모두 자신을 어거스틴의 후예로 여겼다.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만나는 인물이 바로 그다. 어거스틴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고, 진리를 찾아 여러 사상을 전전했다. 한때는 마니교라는 이원론적 종교에 빠졌고, 수사학자로 명성을 좇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의 영혼을 채
유찬호 · 2026-05-31
한국 교회의 청소년·청년 집회를 둘러싼 논의는 대개 무대 위를 향한다. 음악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조명과 연출이 감정을 조작한다, 찬양이 가벼워졌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과녁을 비껴간다. 무대 위의 현상은 결과일 뿐이다. 진짜 물음은 그 무대를 기획하고 세운 사람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 집회를 설계한 사역자는 무엇을 위해, 어떤 신학적 확신 위에서 그것을 만들었는가. 다음세대 사역의 위기는 문화의 위기가 아니라 그 문화를 다루는 사역자의 철학의 위기다. 먼저 사역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의 가장 강한 논리를 들어 보자. 현장
박서연 · 2026-05-31
한국 교회의 선교 지형이 흔들리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의 대표적 선교사 파송국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파송 인력은 정체되고 고령화되는 한편, 한국 사회 안에서는 도리어 복음을 들어야 할 영역이 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보내는 교회였던 한국이 다시 보냄받아야 할 땅으로 거론되는 역설이다. 수치가 이 흐름을 뒷받침한다. 국내 주요 선교 단체들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파송 선교사 수는 한동안 가파르게 늘다가 근래 증가세가 멈췄고, 신규 헌신자보다 은퇴·귀국 선교사가 많아지는 시점에 다가서고 있다. 정확한 연도별
이준혁 · 2026-05-31
복음주의라는 말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특정 정치 성향을 가리키는 표지이고, 어떤 이에게는 현대적 찬양과 자유로운 예배 형식을 뜻하며, 또 어떤 이에게는 대형교회의 성장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한 단어가 이렇게 여러 갈래로 쓰일 때, 그 단어의 본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어원은 단순하다. 헬라어 유앙겔리온(euangelion), 곧 복음, 좋은 소식이다. 종교개혁 시기 이 말은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맞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이들을 가리켰다. 18
박서연 · 202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