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색의 전쟁, 그 끝에서 우리가 잃은 것
유찬호 기자·기사작성일 : 2026-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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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로 향하는 길에 한 가지 풍경을 떠올려 보자. 같은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던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파란색을, 다른 사람은 빨간색을 지지한다. 한때 그들은 같은 식탁에서 떡을 떼던 형제였다. 그러나 지금 둘은 서로를 견디지 못한다. 한쪽 눈에 다른 쪽은 나라를 망치는 세력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같은데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형제가 적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적지 않은 풍경이다.
이런 시대에 가장 그럴듯하게 들리는 조언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히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중립은 없으며, 침묵은 곧 악에 대한 동조라는 것이다. 진리의 편에 서는 일은 곧 옳은 진영을 선택하는 일이며, 양다리를 걸치는 미지근함이야말로 비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단호하고 명료하며, 신앙적 열심처럼 들린다.
이 입장의 가장 강한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공적 영역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정의와 불의가 분명히 갈리는 사안에서 적당히 양쪽을 오가는 태도는 비겁이 맞다. 신앙은 분명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옳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옳은 진영을 선택하라는 명령은 한 가지 거대한 전제를 깔고 있다. 이 세상에 옳은 진영과 그른 진영이 깨끗하게 나뉘어 존재한다는 전제다. 파란색은 정의이고 빨간색은 불의이거나, 그 반대라는 전제다. 그리고 바로 이 전제가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의 핵심이다.
먼저 역사가 이 전제를 무너뜨린다. 교회가 한 진영과 한 몸이 되었던 일은 새롭지 않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올린 뒤, 박해받던 교회는 권력을 쥐었다. 축복처럼 보였으나 그 순간부터 교회는 권력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진리로 설득하던 교회가 힘으로 굴복시키는 법을 익혔다. 종교개혁기는 더 참혹했다. 17세기 독일을 휩쓴 30년 전쟁에서 개신교 진영과 가톨릭 진영은 신앙의 이름으로 맞붙었고, 그 땅의 인구가 크게 줄어들 만큼 서로를 죽였다. 신앙이 진영의 깃발이 되자, 그 깃발 아래에서 사람들은 형제를 학살했다. 역사는 이 길의 끝을 이미 보여 주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종교개혁가들 자신이 정치 참여를 독려하지 않았는가. 옳은 말이다. 칼뱅은 제네바의 공적 질서에 깊이 관여했고, 통치자란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이며 정의를 행하고 약자를 보호할 책임을 진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의 공적 무관심을 그는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다.
여기서 결정적인 구별이 필요하다. 종교개혁가들이 말한 정치 참여와 오늘의 진영 전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칼뱅이 강조한 것은 통치자가 하나님 앞에서 정의를 행할 책임이었지, 특정 진영이 절대선이고 반대 진영이 절대악이라는 선언이 아니었다. 루터의 두 정부론은 이 분별을 더 선명하게 한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영적 통치와 법으로 사회를 다스리는 세속 통치, 두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루터의 경고는 단호하다. 이 둘을 뒤섞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을 정치의 도구로 삼는 일도, 정치를 복음의 자리에 올려놓는 일도 둘 다 위험하다.
이 통찰로 오늘을 비추면 우리 시대의 병이 또렷이 드러난다. 색깔의 전쟁은 정확히 루터가 경고한 혼동이다. 정치적 진영을 복음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자기 진영의 승리를 하나님 나라의 전진으로, 상대의 승리를 어둠의 세력으로 여긴다. 정치적 입장이 신앙의 시금석이 되고, 같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가 다른 색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적이 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오해를 단호히 끊어야 한다. 진영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말은 모든 사안에서 입을 다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색깔의 우상화를 거부하는 일이 진리 앞에서의 침묵으로 미끄러져서는 안 된다. 둘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진영을 신성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이지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자리에서 분별하기를 멈추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배교다.
성경은 인간의 성과 가정에 관해 모호하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언약적 결합인 결혼 안에 가정을 세우셨다. 이것은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다. 그러므로 동성 간의 성적 결합을 결혼으로 제도화하려는 흐름, 가정의 경계를 해체하고 성을 개인의 선택으로 재정의하려는 탈가족화의 흐름 앞에서, 교회는 그것이 창조 질서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이를 분별하는 일은 혐오가 아니다.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정하신 선한 질서를 증언하는 일이다.
가정이 견고한 언약이 아니라 해체 가능한 계약으로 여겨질 때, 가장 먼저 상처 입는 것은 그 안의 약한 자들, 곧 아이들이다. 성이 창조의 선물이 아니라 무한한 자기표현의 무대로 재정의될 때, 사람은 자유를 얻은 듯 보이나 실은 정체성의 혼란과 관계의 파편화라는 깊은 병을 앓는다. 이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 안으로 이미 깊이 스며든 현실이다. 교회가 이 흐름 앞에서 침묵하거나 시류에 영합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다만 이 분별이 다시 색깔의 전쟁으로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 창조 질서를 증언하는 일과 특정 진영을 메시아로 떠받드는 일은 다르다. 어떤 정당이 이 사안에서 옳은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 절대선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정당의 다른 부패까지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진리를 진리대로 말하되 그 진리를 한 진영의 전리품으로 넘기지 않는 것, 그것이 분별과 우상화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이제 가장 깊은 곳을 보자. 색깔의 전쟁이 우리에게 거는 거짓말의 정체는 하나의 약속에 압축된다. 우리 편이 이기면 세상이 구원받는다는 약속이다. 기독교 교리는 이 약속이 거짓임을 분명히 한다. 전적 타락의 교리는 어떤 인간도, 어떤 진영도 본질적으로 의롭지 않다고 가르친다. 죄는 파란색에도 빨간색에도 똑같이 스며 있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선은 진영과 진영 사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를 지난다. 어느 색이 완전히 승리하면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기대는 환상이다. 인간이 만든 어떤 체제도, 어떤 정당도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의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고,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어거스틴이 길을 비춘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두 도성을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과 자기를 사랑하여 세워진 세상의 도성이다. 로마가 함락되어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 왔다고 절규할 때 어거스틴의 대답은 놀라웠다. 영원한 도성은 로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소망을 세상 권력에 걸지 않았기에, 그들은 어느 진영이 이기든 자유롭게 정의를 말하고 담대하게 진리를 증언할 수 있었다. 영원한 도성에 속한 자만이 세상의 도성에서 진정으로 자유롭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마주한 길은 여러 거짓 사이의 좁은 길이다. 한쪽 절벽은 정치적 무관심이다. 다른 쪽 절벽은 정치적 우상숭배다. 또 하나의 절벽은 시류에의 영합이다. 세 절벽 모두 낭떠러지다.
좁은 길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표를 진지하게 던지되 그 한 표에 구원을 걸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자리에서 담대히 진리를 증언하되 그 진리를 한 진영의 무기로 넘기지 않는다. 창조 질서를 흔드는 흐름에 분명히 맞서되 그 사안에서 같은 편이 된 진영을 메시아로 떠받들지 않는다. 다른 색을 지지하는 형제를 사탄으로 몰지 않되 진리를 진리라 부르기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색은 바뀌어도 부르심은 바뀌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는 파랗지도 붉지도 않았다. 그 피는 진영을 가르지 않고 모든 죄인을 위해 흘렀으며, 동시에 그 죄를 죄라 부르는 거룩한 피였다. 그 피 앞에 설 때, 우리는 색깔의 전쟁이 얼마나 작은지를 보는 동시에 진리가 얼마나 타협할 수 없는지를 본다. 두 색이 다투는 세상 한복판에서 교회는 그 어느 색에도 속하지 않는 한 깃발을 들어야 한다. 십자가다. 그 깃발은 진영을 초월하나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며, 죄인을 품으나 죄를 미화하지 않는다. 그 깃발 아래에서만 갈라선 형제가 다시 한 식탁에 앉고, 병든 세상이 참된 치유의 길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