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aria Butterfield와 Jared Moore가 Reformation21에 공동 기고문을 냈다. 소멸론(annihilationism), 곧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부정하고 악인의 영혼이 결국 소멸한다고 보는 견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이다. 두 저자의 진단은 날카롭다. 소멸론은 셀리베이트 게이 신학 2.0이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두 흐름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분석이다. 불편한 성경 본문을 시대의 감수성에 맞게 완화하려는 동일한 해석학적 충동이 그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가 거북할 때 본문을 바꾸는 방
박서연 · 2026-06-06
미국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남성의 교회 출석률이 여성을 추월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랫동안 여성이 다수를 차지해 온 교회 인구 구조가 뒤집힌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는 또 다른 신호가 담겼다. 성인 세 명 중 한 명이 AI의 영적 조언이 목회자의 조언만큼 믿을 만하다고 답했다는 응답이다. 두 흐름은 따로 떨어진 통계가 아니다. 여성 성도의 이탈과 AI의 영적 권위 부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숫자의 이면을 읽어야 한다. 남성 출석의 상대적 증가가 신앙의 회복인지, 여성 이탈에 따른 착시인지는 더 지켜볼 문제다. AI가 목회자만
이준혁 · 2026-06-06
새벽, 한 사람이 화면 앞에 앉는다. 풀리지 않는 물음을 입력한다. 몇 초 만에 매끄러운 답이 돌아온다. 출처가 정리되고, 논점이 가지런하며, 문장은 흠잡을 데 없다. TGC는 바로 이 장면을 향해 "AI를 사용하기 전에 전도서를 읽으라"는 글을 실었다. 제목은 도발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단은 오래되고 깊다. AI를 향한 기대를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인류는 언제나 도구를 만들어 자기 한계를 넘어 왔다. 문자가 기억의 한계를 넘었고, 인쇄가 지식의 독점을 깼으며, 검색이 정보의 문턱을 낮췄다. AI는 그 계보의 가장 최근 항목
유찬호 · 2026-06-06
설교단에 인공지능이 들어오고 있다. Desiring God의 Greg Morse는 여호수아가 아이 성(Ai)에서 겪은 패배를 거울로 삼아 AI 설교의 유혹을 경고했다. AI 설교를 옹호하는 논리는 강력하다. 목회자는 늘 시간에 쫓긴다. 심방과 행정, 상담과 기도로 한 주가 채워지고 설교 준비 시간은 늘 부족하다. AI는 그 결핍에 정확히 응답한다. 초안을 생성하고, 적절한 예화를 제안하며, 본문에서 적용점을 끌어낸다. 결과물의 완성도도 낮지 않다. 더 많은 영혼에게 더 나은 설교를 전할 수 있다면 도구를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유찬호 · 2026-06-06
고대 지중해 세계에는 도시 이름이 타락의 대명사가 된 곳이 있었다. '고린도 사람처럼 굴다.' 방탕하게 논다는 뜻으로 쓰였다. 고린도는 두 바다를 잇는 상업의 교차로였고, 돈과 쾌락이 함께 흘렀다. 한 도시의 이름이 욕망의 은어가 되기까지, 그 도시가 무엇을 자랑으로 삼았는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가 바로 그 도시에 있었다.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교회 안은 그래도 안전했다. 문제는 교회 밖이었다. 거리로 나서면 분위기가 달랐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너만 유별난 게 아니다. 고린도에서는 원래
유찬호 · 2026-06-03
한국 교회의 청년이 줄고 있다. 주일 예배당에서 청년의 자리가 비어 가고, 청년부가 사라진 교회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러나 청년이 떠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왜 떠나는가이다. 이유를 잘못 짚으면 처방도 빗나간다. 흔한 진단은 청년의 신앙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세속 문화에 물들고 편안함을 좇다 보니 교회를 등졌다는 설명이다. 이 진단에는 일부 사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떠난 청년들의 목소리를 모아 보면 그림은 더 복잡하다. 많은 경우 그들은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실망한 것이다. 말과 삶이 다
최다은 · 2026-05-31
AI가 앗아 가는 것은 인간의 일자리가 아니다. 인간이 왜 일하는가, 더 깊게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복음연합(TGC)에 실린 한 고백이 그 단면을 보여 준다. 한 대학생이 한 학기 내내 AI로 과제를 베끼고 수고를 건너뛴 일을 털어놓는다. 편리했고 주변 대부분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이 포기한 것은 한 과목의 성적이 아니라 스스로를 빚어 가는 수고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학생의 문제도, 한 세대의 문제도 아니다. AI가 과제를 처리하고 코드를 짜고 글을 대신 써 주는 세계에서 사람은
유찬호 · 2026-05-31
신앙생활을 조금만 깊이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물음에 걸려 넘어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 내가 기도하고 선택하고 애쓰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전도하고 결단을 촉구하는 일은 헛수고가 아닌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 오래된 긴장은 신학 교과서의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무릎 앞에 놓인 실제 물음이다. 성경은 두 진리를 동시에 가르친다. 한편으로 구원의 모든 단계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그분에 의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 믿으
박서연 · 2026-05-31
교회 안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우리 교회는 개혁주의라는 말, 저 목사는 복음주의 노선이라는 말,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른다는 말이다. 익숙하게 오가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말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 어떻게 다른지 물으면 답이 흐릿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이름들을 들으면서도 그 내용을 붙들지 못한 채 분위기로만 받아들인다. 이름을 안다는 것과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를 안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먼저 이 구별을 사소하게 여기는 시선이 있다.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면 됐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따지는 일이 무슨 의미가
유찬호 · 2026-05-31
신학자라고 하면 서재에 파묻혀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깊은 신학을 평범한 신자의 손에 쥐여 준 사람이 있다. 영국 출신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다. 그의 이름은 낯설어도 그의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은 한국 교회에서도 오래 사랑받아 온 책이다. 패커는 깊은 신학과 보통 신자의 삶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이었다. 패커의 생애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그가 학문적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평신도를 위한 글을 평생 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청교도 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였다. 17세기 영국 청교도들
최다은 · 2026-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