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세우는가
유찬호 기자·기사작성일 : 2026-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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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육이라는 말은 흔히 좁게 쓰인다. 주일학교 공과, 성경 암송, 학교 채플. 신앙은 신앙대로 가르치고 지식은 지식대로 가르친다는 구도다. 수학 시간에는 수학을, 성경 시간에는 성경을 다룰 뿐 둘은 평행선처럼 만나지 않는다. 오늘 한국 교회와 기독교 학교가 말없이 받아들인 교육관이 여기에 있다.
이 구도에는 따져보지 않은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신앙을 뺀 나머지 영역은 중립이라는 전제다.
이 전제를 가장 정교하게 다듬은 것은 근대의 세속 교육론이다. 공교육은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아야 하며, 사실은 신념과 분리될 수 있고, 객관적 지식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주장이다. 신앙은 사적 영역에 두고 교실에서는 검증 가능한 사실만 다루자는 것이다. 정교분리의 상식처럼 들리는 이 논리에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도 절반쯤 설득되어 있다.
이 입장에도 정당한 부분이 있다. 종교를 빙자한 강요와 무지의 주입은 분명히 위험하다. 신앙의 이름으로 생각을 닫게 만드는 교육은 기독교 교육이 아니라 그 변질이다. 세속 교육론은 바로 그 폭력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가치중립적 교육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을 무엇이라 보느냐에 따라 교육의 목표가 달라진다. 인간을 효율적인 생산자로 보면 교육은 기술의 훈련이 된다. 욕망의 덩어리로 보면 그 욕망을 채우는 방법의 전수가 된다. 스스로를 빚어가는 존재로 보면 끝없는 자기표현의 무대가 된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중립이 아니다. 저마다 인간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대답을 먼저 깔고 있다. 중립을 내세운 교육조차 실은 "삶의 의미는 각자 알아서 정하라"는 하나의 신념을 가르친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 지점을 오래 붙들어 왔다. 카이퍼가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이라 부른 사상이다. 삶의 모든 영역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단 한 뼘의 땅도 없다는 것이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이 관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과목의 하나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수학의 질서, 자연의 법칙, 역사의 흐름, 언어의 아름다움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한 분의 손에서 나왔다면, 그것을 배우는 일은 그 자체로 창조주를 만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의 핵심 질문은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세우는가"이다. 정보를 더 많이 담은 머리가 아니라, 자기가 누구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는지 아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다. 지식과 경건을 둘로 쪼개지 않는 일이다. 아는 것이 곧 사랑으로 이어지고, 배우는 것이 곧 예배로 이어지는 일이다.
여기에는 피해야 할 두 함정이 있다. 하나는 세상을 향한 적개심이다. 세상의 학문을 적의 무기로만 보고 담을 쌓는 태도다. 창조 세계가 본래 누구의 것인지 잊은 패배주의다. 다른 하나는 무비판적 받아들임이다. 세속 교육의 전제를 그대로 들이고 성경 구절만 얹는 태도다. 분별 없는 승리주의의 다른 얼굴이다. 둘 다 길이 아니다.
다음세대 신앙 전수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은 아이들이 성경 지식을 덜 외운 데 있지 않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세계와 주일의 세계가 따로 노는 데 있다. 교실에서 배운 세계관과 예배당에서 고백한 신앙이 만나지 않는 데 있다. 기독교 교육은 그 갈라진 두 세계를 다시 잇는 일이다.
어거스틴은 진리가 어디서 발견되든 그것은 주님의 것이라 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교실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일은 신앙의 바깥이 아니라 신앙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길러내야 할 것은 잘 외우는 아이가 아니라, 세상 어디를 보아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읽어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교육의 끝은 정보가 아니라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