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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쓰기 전에 전도서를 읽으라

유찬호 기자·기사작성일 : 2026-05-31 00:00
AI를 쓰기 전에 전도서를 읽으라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새벽, 한 사람이 화면 앞에 앉는다. 풀리지 않는 물음을 입력한다. 몇 초 만에 매끄러운 답이 돌아온다. 출처가 정리되고, 논점이 가지런하며, 문장은 흠잡을 데 없다. TGC는 바로 이 장면을 향해 "AI를 사용하기 전에 전도서를 읽으라"는 글을 실었다. 제목은 도발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단은 오래되고 깊다. AI를 향한 기대를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인류는 언제나 도구를 만들어 자기 한계를 넘어 왔다. 문자가 기억의 한계를 넘었고, 인쇄가 지식의 독점을 깼으며, 검색이 정보의 문턱을 낮췄다. AI는 그 계보의 가장 최근 항목이다. 그것은 방대한 자료를 즉시 정리하고, 흩어진 단서를 엮어 통찰처럼 보이는 답을 건넨다. 글을 쓰지 못하던 이가 글을 쓰고, 묻지 못하던 이가 묻는다. 지식의 민주화라는 표현이 과장만은 아니다. 이 유익을 부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태도다. 그러나 전도서는 바로 그 풍요의 한복판에서 다른 진실을 증언한다. 전도서의 화자는 정보 부족에 시달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당대 누구보다 많이 알았고, 많이 가졌으며, 많이 시도했다. 지혜를 구해 끝까지 밀어붙였고, 쾌락과 재물과 학문과 노동을 차례로 통과했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자리는 절정의 깨달음이 아니라 헛됨이었다. 지혜가 깊어질수록 번뇌도 깊어지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근심도 늘더라는 그의 탄식은, 정보의 축적이 곧 지혜라는 시대의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더 많이 아는 것이 더 깊이 사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단어 하나에 있다. 지혜다. 현대인은 정보와 지식과 지혜를 자주 뒤섞는다. 정보는 사실의 조각이고, 지식은 그 조각의 정돈이다. 그러나 지혜는 다르다. 지혜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정렬하는 능력이다. 전도서가 마지막에 내놓는 결론이 그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은 뒤 사람에게 남는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일이다. 잠언이 거듭 선포하듯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지혜는 데이터에서 추출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의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AI는 정보를 무한히 모을 수 있으나 그 두려움을 가질 수 없다. 경외할 줄 모르는 존재는 지혜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이 유혹은 새롭지 않다. 인류가 처음 넘어진 자리도 지식의 문제였다. 동산의 시험은 더 많이 알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리라는 속삭임, 곧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분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자율의 환상이었다. 인간은 지식 자체를 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지식을 소유하려 했다. 그 단절이 타락이었다. AI가 건네는 답이 위험해지는 지점도 정확히 거기다. 답이 틀려서가 아니라, 답을 구하는 자리가 창조주에게서 끊어질 때다. 새로워 보이는 모든 오류가 그렇듯, 이 또한 오래된 유혹이 입은 최신의 외피다. 세속의 시대는 초월을 향한 문을 닫고 답을 내부에서만 구한다. 하늘이 비어 있다고 전제한 세계는 신탁을 잃었으나 신탁을 향한 갈망까지 잃지는 않았다. AI는 그 빈자리에 들어선 내재적 신탁이다. 권위 있는 목소리로 들리고, 망설임 없이 답하며, 인간의 죄책이나 한계를 되묻지 않는다. 사람들이 AI의 조언을 목회자의 조언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신뢰한다는 보고가 우연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문제는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신뢰의 방향이다. 누구의 음성에 인생의 무게를 맡길 것인가. 지혜는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형성되는 것이다. 본문과 씨름하고, 침묵 속에 기다리고, 실패를 통과하며, 기도로 견디는 과정에서 사람 안에 빚어진다. AI는 그 과정을 건너뛰게 해 준다. 결론을 즉시 제공함으로써 결론에 이르는 여정을 생략하게 한다. 그러나 생략된 여정에서 형성되었어야 할 분별과 인내와 겸손도 함께 사라진다. 편리는 형성을 이기지 못한다. 빠른 답을 얻은 자가 곧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술을 향한 적개심으로 흐를 일은 아니다. AI를 악마화하는 것은 그것을 우상화하는 것만큼이나 분별 없는 태도다. 도구는 도구다. 망치가 집을 짓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듯, AI도 섬기는 손에 들리면 섬기고 군림하는 손에 들리면 군림한다. 분별의 과제는 도구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도구를 그 자리에 두는 데 있다. 승리주의도 패배주의도 정답이 아니다. 전도서가 가리키는 지혜의 끝에는 결국 한 인격이 서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했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다. 지혜는 마침내 데이터가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 지혜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지혜에서 완성된다. AI는 정보를 모으고 답을 정리할 수 있으나, 무릎 꿇을 줄 모르고 예배할 줄 모르며 자기 너머의 누군가를 가리킬 줄 모른다. 전도서가 오늘의 독자에게 건네는 경고는 단순하다. 답을 구하기 전에 누구 앞에서 구하는지를 먼저 묻는 일이다. AI를 쓰기 전에 전도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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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호

작성일 : 202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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