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무대가 아니라 무대를 세운 사람이다, 다음세대 사역의 철학을 묻다
박서연 기자·기사작성일 : 2026-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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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청소년·청년 집회를 둘러싼 논의는 대개 무대 위를 향한다. 음악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조명과 연출이 감정을 조작한다, 찬양이 가벼워졌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과녁을 비껴간다. 무대 위의 현상은 결과일 뿐이다. 진짜 물음은 그 무대를 기획하고 세운 사람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 집회를 설계한 사역자는 무엇을 위해, 어떤 신학적 확신 위에서 그것을 만들었는가. 다음세대 사역의 위기는 문화의 위기가 아니라 그 문화를 다루는 사역자의 철학의 위기다.
먼저 사역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의 가장 강한 논리를 들어 보자. 현장의 다음세대 사역자들은 누구보다 헌신적이다. 적은 사례와 과중한 업무 속에서 청소년 한 사람을 붙들기 위해 밤낮으로 애쓴다. 효과적인 집회 형식을 찾아 다른 교회를 벤치마킹하는 일은 게으름이 아니라 성실의 표현이다. 이 옹호에는 정당한 부분이 있다. 현장 사역자의 헌신 자체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헌신과 철학은 다른 문제다. 그리고 다음세대 사역의 가장 깊은 균열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많은 사역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잘 알지만 왜 그것을 하는가에는 답하지 못한다. 좋아 보이는 집회가 있으면 그 형식을 가져온다. 효과가 있다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그대로 옮긴다. 어느 교회의 수련회가 부흥했다는 소문이 돌면 그 방식이 빠르게 복제된다. 이것은 적응이 아니라 기생이다. 자기 신학적 토대 위에서 형식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한 형식에 기대어 토대 없이 운영하는 것이다. 철학이 없는 자리를 유행이 채운다.
철학의 부재가 왜 치명적인지는 분명하다. 신학적 확신이 없는 사역자는 형식을 평가할 기준을 갖지 못한다. 그에게 좋은 집회란 청년이 많이 모이고 분위기가 뜨겁고 눈물이 흐른 집회다. 그러나 이 기준 어디에도 진리가 없다.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 가르침이 성경에 부합하는가, 청년의 삶이 복음의 방향으로 바뀌었는가를 묻는 자리가 비어 있다. 기준이 없으니 결과로 판단하고, 결과로 판단하니 더 큰 자극을 좇는다. 다음세대 사역이 점점 더 강한 연출과 더 화려한 무대로 치닫는 까닭은 청년들이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사역자가 그것 말고 의지할 기준을 갖지 못해서다.
이 진단을 한 걸음 더 밀고 가면 불편한 질문에 닿는다. 사역자들은 어디서 이런 모습으로 길러졌는가. 다음세대 사역의 철학이 부재하다면, 그 사역자를 양성한 교육은 무엇을 했는가. 문제의 뿌리는 현장의 개별 사역자가 아니라 그들을 세상에 내보낸 교육 구조에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신학교 교육을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 한국의 신학 교육은 오랫동안 학문적 신학과 목회 현장 사이의 간극을 안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조직신학과 성경 원어와 교회사를 가르치지만, 그 신학을 어떻게 다음세대의 언어로 살아 있게 전할지는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반대로 실천신학이 강조될 때는 효과적인 사역 기술이 신학적 깊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깊은 신학을 가졌으나 적용할 줄 모르는 사역자, 혹은 적용에 능하나 신학적 토대가 얕은 사역자가 길러진다.
다만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신학교만을 탓하는 것은 또 다른 단순화다. 청년이 많이 모이는 사역자를 유능하다고 평가하는 교회의 시선 자체가 사역자를 그 방향으로 몰아간다. 책임은 신학교와 교단과 개교회가 나누어 진다. 그러나 사역자의 신학적 분별력을 빚어내는 일차적 자리가 신학 교육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회복의 순서는 분명하다. 무대를 손보기 전에 무대를 세운 사람을 세워야 하고, 사람을 세우려면 그를 길러내는 교육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질문이 신학 교육과 사역자 양성의 자리에 던져져야 한다. 첫째, 우리는 사역자에게 무엇을 할지를 가르치는가, 왜 그것을 하는지를 가르치는가. 둘째, 신학을 현장과 분리된 지식으로 가르치는가, 살아 있는 분별의 도구로 가르치는가. 셋째, 사역의 성공을 무엇으로 정의하도록 가르치는가. 모인 숫자와 뜨거운 분위기인가, 진리 위에 세워진 삶의 변화인가.
다음세대를 향한 우려의 끝은 청년들에게 있지 않다. 그들을 가르치는 사역자에게 있고, 더 깊게는 그 사역자를 빚어내는 교육에 있다. 무대 위의 조명을 손보는 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역자가 자기 신학으로 서고, 그 신학이 신학교에서 살아 있는 분별로 길러질 때, 비로소 다음세대 사역은 유행에 기생하기를 멈추고 진리 위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