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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타락의 대명사가 된 도시에서, 교회는 무엇을 지켰나

유찬호 기자·기사작성일 : 2026-06-03 00:00
타락의 대명사가 된 도시에서, 교회는 무엇을 지켰나

Photo by Simon Ray on Unsplash

고대 지중해 세계에는 도시 이름이 타락의 대명사가 된 곳이 있었다. '고린도 사람처럼 굴다.' 방탕하게 논다는 뜻으로 쓰였다. 고린도는 두 바다를 잇는 상업의 교차로였고, 돈과 쾌락이 함께 흘렀다. 한 도시의 이름이 욕망의 은어가 되기까지, 그 도시가 무엇을 자랑으로 삼았는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가 바로 그 도시에 있었다.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교회 안은 그래도 안전했다. 문제는 교회 밖이었다. 거리로 나서면 분위기가 달랐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너만 유별난 게 아니다. 고린도에서는 원래 다 그렇게 산다." 이 말은 위협이 아니라 권유의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믿음을 잠식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대학 신입생 가운데 상당수가 입학 1년 안에 학교를 떠난다. 대학알리미 공시 자료를 보면 서울 주요 대학에서도 신입생 10명 중 1명 이상이 첫해를 넘기지 못하고 학적을 정리한다. 교육 당국과 입시기관이 공통으로 지목하는 구조적 원인은 전공 불일치와 진로 불확실성이다. 자신이 왜 그 학과를 택했는지 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부모의 권유였거나, 취업률 통계였거나, 교사의 추천이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부모의 조언을 듣는 것은 지혜이고, 생계를 헤아리는 것은 청지기의 책임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 모든 목소리 위에 무엇이 최종 기준으로 서 있었는가. 그 자리가 비어 있으면, 사람은 가장 큰 목소리에 떠밀려 간다. 남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 되고, 남이 가면 나도 가는 것이 되고, 남이 원하면 그것이 곧 내 선택이 되었다. 이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은 종의 삶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썼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린도전서 15:33). 흥미로운 것은 이 문장의 출처다. 이 구절은 헬라 희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시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환경이 사람을 빚는다는 사실은 성경이 처음 발견한 진리가 아니라, 세상도 이미 알고 있던 상식이었다. 바울은 그 상식을 끌어와 교회 앞에 다시 세웠다. 원어의 명령형도 단호하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분별이 필요하다. 일과 직업과 돈을 성경은 멸시하지 않는다. 노동은 타락 이전 에덴에서 이미 주어진 명령이었고(창세기 2:15), 십계명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명한다. 종교개혁은 목회자의 일만 거룩하고 농부와 상인의 일은 세속이라는 이원론을 깨뜨렸다. 루터와 칼빈은 모든 합법적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이며 이웃을 섬기는 자리라고 가르쳤다. 카이퍼는 경제와 교육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다고 보았다. 돈도 마찬가지다. 악의 뿌리는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며(디모데전서 6:10),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도리어 신자의 의무다(디모데전서 5:8). 재물은 좋은 종이지만 나쁜 주인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했다(마태복음 6:24). 문제는 대학과 직장과 돈이 아니다. 그것들이 최종 기준의 자리에 오를 때다. 좋지만 차선인 것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그 앞에서 자기를 잃는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결국 잃게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경고한 멍에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복음이 주는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그렇다고 제 마음대로 사는 자율도 아니다. 그리스도께 매임으로 도리어 누리는 자유, 세상의 눈치와 흐름에서 풀려나는 해방이다. 그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로마서 12장 2절이 답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변화는 결심에서 오지 않는다. 새로워진 마음에서 온다. 그 새 마음은 제 취향을 따르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빚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최종 기준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세상의 기준이 그 자리를 채운다. 마음에 진공은 없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요구한 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타락한 도시 한복판에 교회로 남는 것, 고린도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고린도 사람처럼 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터를 떠나 거룩한 곳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터와 가정과 학교에서 부르심대로 사는 것이었다. 도덕적 우월감으로 될 일이 아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 그 하나로만 가능하다. 오늘의 도시는 고린도보다 정교하다. 알고리즘은 취향을 길들이고, 또래 집단은 보이지 않는 규범을 강제하며, "다들 그렇게 하잖아"는 말은 들리지도 않은 채 공기처럼 스며든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라 부른 시대정신은, 진정한 나를 찾으라고 권하면서 실은 무엇이 진정한 나인지를 시장과 또래가 대신 정의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라는 권유조차, 끝내는 또 다른 종속으로 이어진다. 이 안에서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일은 반사회적 고집이 아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아를 붙드는 일이다. 남이 만들어 건넨 정체성도, 내가 스스로 빚어낸 정체성도 아닌, 하나님이 부르신 그 자리에 선 나를 지키는 일이다. 고린도는 사람들에게 고린도 사람처럼 살라고 권했다. 그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자유라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자유의 끝이 어디인지 알았다. 그가 가리킨 자유는 흐름을 거슬러 자리를 지키는 자유였고, 그 자리를 지키게 하는 힘은 도덕적 결심도 자기 확신도 아닌, 날마다 새로워지는 말씀에 있었다. 타락한 도시 한가운데서 교회가 교회로 남는 길은, 결국 그 한 가지로 모인다. 글 유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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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호

작성일 : 202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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