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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계가 일을 대신하는 시대, 인간은 무엇으로 남는가

유찬호 기자·기사작성일 : 2026-05-31 00:00
기계가 일을 대신하는 시대, 인간은 무엇으로 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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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앗아 가는 것은 인간의 일자리가 아니다. 인간이 왜 일하는가, 더 깊게는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복음연합(TGC)에 실린 한 고백이 그 단면을 보여 준다. 한 대학생이 한 학기 내내 AI로 과제를 베끼고 수고를 건너뛴 일을 털어놓는다. 편리했고 주변 대부분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자신이 포기한 것은 한 과목의 성적이 아니라 스스로를 빚어 가는 수고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학생의 문제도, 한 세대의 문제도 아니다. AI가 과제를 처리하고 코드를 짜고 글을 대신 써 주는 세계에서 사람은 누구나 같은 질문 앞에 선다. 내가 굳이 해야 하는가. 세계는 이 질문에 한 가지 답만 내민다. AI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는 답이다. 이 조언은 친절하고 현실적이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옮겨 가 거기서 인간의 자리를 지키라는 것이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이 답에 고개를 끄덕인다. 일자리를 지키는 일은 가족을 지키는 일이고, 가족을 지키는 일은 책임 있는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답의 가장 강한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려는 성실함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답이 인간을 재는 자다. AI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는 말은 인간의 가치를 쓸모의 크기로 환산한다. 그리고 이 셈법은 기계 앞에서 인간을 끝내 패배시킨다. 속도와 정확성에서 인간은 결코 알고리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을 생산성 위에 세우는 한, 인간은 자기가 만든 도구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다. 더 잘하는 것을 찾아 도망치는 길은, 더 잘하는 기계가 또 등장하는 순간 다시 막힌다. 이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려면 더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왜 일하는가. 그 답은 창세기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세계를 경작하고 다스리라는 부름을 함께 받았다. 일은 타락의 형벌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였다. 에덴에서 사람은 이미 땅을 갈고 지키는 자리에 세워졌으며, 그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레째 안식하셨듯 일과 쉼은 인간됨의 결에 처음부터 새겨져 있었다. 인간이 일하는 것은 그것이 생계의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일하도록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진리를 소명(vocatio)이라는 말로 길어 올렸다. 그는 소명을 두 층위로 이해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인간이라는 보편적 소명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가 놓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 내는 특수한 소명이다. 농부가 밭을 갈고 장인이 목재를 다듬는 일이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협력이라는 것이다. 세속의 노동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이 통찰은 종교개혁이 세상에 건넨 가장 혁명적인 선물 가운데 하나였다. 거룩한 일과 속된 일을 가르던 오랜 벽을 복음이 허문 것이다. 소명의 근거는 처음부터 효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더 잘하는 도구가 등장한다고 해서 인간을 향한 부름이 취소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이 진실을 잊는다면 AI는 실제로 무언가를 훔쳐 간다. 그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일을 통해 빚어지는 과정이다. 노력의 습관, 실패를 통과하며 자라는 성숙, 땀으로 완성한 결과 앞에서 차오르는 자기 존중. 이것들은 노동이 우연히 남기는 부산물이 아니다. 자신이 지음받은 대로 살아 낸 사람에게 하나님이 쥐여 주시는 선물이다. 기계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형성되는 것은 언제나 일하는 사람 쪽이다. 답을 너무 쉽게 얻고 씨름 없이 결과를 손에 넣는 환경에서는 이 형성의 기회조차 사라진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별해야 한다. 수고를 건너뛰려는 유혹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에덴에서 뱀이 건넨 제안의 본질도 같았다. 하나님처럼 되는 길로 가는 지름길, 신뢰의 수고를 건너뛰는 손쉬운 통로였다. 그 학생이 과제를 베낄 때 포기한 것이 바로 그 신뢰의 수고였다. 새로워 보이는 시대의 유혹은 대개 가장 오래된 유혹의 재포장이다. AI는 그 유혹을 더 매끄럽고 더 거부하기 어려운 형태로 인간 앞에 다시 내려놓을 뿐이다. 복음의 셈법은 세계의 셈법과 다르다. 성경이 종에게 약속한 상급은 성과의 크기가 아니라 충성의 깊이였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은 똑같은 칭찬을 듣는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주인이 헤아린 것은 산출량이 아니라 신실함이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얼마나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자신을 지으시고 이름으로 부르신 분 앞에서 신실하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일을 천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의 아들조차 손으로 나무를 다루는 목수로 살았다. 우주를 지으신 분이 작업대 앞에서 톱밥을 묻히며 사신 것이다. AI는 인간을 대신해 더 많이, 더 빠르게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왜 일하는가에는 끝내 답하지 못한다. 그 답은 효율이 아니라 부름에, 생산이 아니라 형상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빠르기 때문에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지음받았기에 일하는 존재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행한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했다(고전 15:58). 인간의 노동은 새 창조 안에서 거두어질 씨앗이지 알고리즘에 밀려 사라질 잉여가 아니다.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인간이 무엇인지를 다시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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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호

작성일 : 202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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