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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듯 다른 이름들,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는 무엇을 부르는가

유찬호 기자·기사작성일 : 2026-05-31 00:00
같은 듯 다른 이름들, 개혁주의와 복음주의는 무엇을 부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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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다. 우리 교회는 개혁주의라는 말, 저 목사는 복음주의 노선이라는 말,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른다는 말이다. 익숙하게 오가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말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 어떻게 다른지 물으면 답이 흐릿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이름들을 들으면서도 그 내용을 붙들지 못한 채 분위기로만 받아들인다. 이름을 안다는 것과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를 안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먼저 이 구별을 사소하게 여기는 시선이 있다.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면 됐지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따지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름 붙이기는 분열을 낳고 자기 진영을 높이는 교만으로 흐르기 쉽다는 우려다. 이 우려에는 정당한 부분이 있다. 신앙의 본질보다 진영의 명패를 앞세우는 태도는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일과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는 일은 다르다. 단어의 의미를 흐릿하게 두면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모른 채 믿게 되고, 전혀 다른 것이 같은 이름으로 포장될 때 분별하지 못한다. 세 단어를 차례로 풀어 보자. 가장 넓은 범위에 복음주의가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어원 그대로 복음, 곧 좋은 소식을 중심에 둔 신앙의 흐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그 구원을 증언하는 성경의 권위, 그 복음 앞에서 변화되는 삶,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려는 열심. 이 핵심을 공유하는 이들을 폭넓게 복음주의자라 부른다. 복음주의는 특정 교단의 이름이 아니다. 여러 교단과 전통을 가로지르는 큰 강이다. 그 큰 강 안의 한 줄기가 개혁주의다.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는 16세기 종교개혁, 특히 칼뱅으로 대표되는 흐름에서 자라난 구체적인 신학 체계다. 복음주의가 공유하는 핵심 위에, 개혁주의는 더 분명한 강조점을 얹는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언약신학, 인간의 전적 타락과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이다. 다섯 솔라가 그 표어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그 뼈대다. 모든 개혁주의자는 복음주의자이지만, 모든 복음주의자가 개혁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강 전체가 복음주의라면, 개혁주의는 그 강의 한 물줄기다. 개혁교회는 또 다른 층위의 말이다. 개혁주의가 신학의 내용을 가리킨다면,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그 신학을 고백하는 구체적인 교회와 교단을 가리킨다. 신학은 믿음의 내용이고, 교회는 그 내용을 함께 고백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여기서 흔한 혼동 하나를 짚어야 한다. 개혁주의를 한다는 말이 칼뱅의 다섯 가지 요점을 외운다는 뜻으로 좁아지는 경우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몇 개의 교리 항목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보는 시선이다. 카이퍼가 삶의 모든 영역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신학 강의실의 명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의 선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이 이름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첫째, 자기가 선 자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자기 교회가 어떤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지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소를 모르고 사는 것과 같다. 둘째, 이름이 본질을 대신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개혁주의자라는 명패가 곧 경건을 보증하지 않는다. 바른 신학은 목적이 아니라 통로다. 셋째, 이름의 차이를 분별의 도구로 삼되 사랑의 담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 이 원칙이 여기서도 길잡이가 된다. 이 이름들을 아는 일의 끝은 더 나은 명패를 다는 데 있지 않다. 자기가 누구의 것이며 무엇을 믿는지 또렷이 알고, 그 앎으로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데 있다. 개혁주의도 복음주의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둘 다 한 분을 더 바르게 알고 더 충실히 따르기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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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호

작성일 : 202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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