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똑똑한 기계가 승자가 된다' 왓킨, AI 시대의 인간 존엄을 묻다
유찬호 기자·기사작성일 : 2026-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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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으로 시작하자.
"인간의 존엄이 지성에 있다면, 가장 똑똑한 기계가 승자가 된다."
더 가스펠 코얼리션(TGC)이 새로 공개한 칼럼과 팟캐스트 시리즈 '실리콘 스피리추얼리티스'(Silicon Spiritualities)의 문제의식은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저자와 진행자는 문화 신학자 크리스토퍼 왓킨.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호주 모나쉬대학교 부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팀 켈러가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독교 하이 이론(Christian High Theory)"이라 평가한 『성경 비평 이론』(Biblical Critical Theory)의 저자다. 이번 시리즈는 인공지능이 일과 예배, 진리와 권력, 그리고 인간됨에 대해 제기하는 더 깊은 질문들을 다룬다.
왓킨의 진단은 이중적이다. AI는 우리에게 왕과 노예를 동시에 약속한다. AI는 우리 앞에 수많은 에이전트가 도열하여 "당신의 프롬프트가 곧 명령입니다"라고 말하는 군주의 지위를 약속한다. 이메일을 쓰고, 수업을 설계하고, 설교 초안을 잡고, 로고를 만들고, 책을 요약해 준다. 우리는 모두 왕이 되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이야기는 낯설어진다. 우리를 주권자로 만들어 준다던 도구가 조용히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왓킨은 아첨(sycophancy)의 문제를 지적한다. 대규모 언어모델은 강화학습을 통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도록 훈련되었다. 기계는 우리의 변덕을 긍정하고 욕망을 부추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실은 손 안의 기계가 짜놓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삶. 왓킨은 이를 "주권적 노예"(sovereign slave)라고 부른다.
여기서 왓킨은 세계관의 뿌리로 돌아간다. 그는 이전 기고에서 이미 이 지점을 파고든 바 있다. 법학자 존 쿤스와 패트릭 브레넌이 말한 '숙주 속성'(host properties) 접근, 곧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지성·창의성·전략적 통찰 같은 특정 능력에 깃들어 있다는 관점은, AI가 그 일을 더 잘하게 되는 순간 무너진다. 왓킨은 AI가 바로 이 접근의 얕음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묵시적'(apocalyptic)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다른 대답을 준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과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분을 알도록 창조하셨다. 창조 명령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창조주와의 관계, 서로와의 관계, 피조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교제가 사명보다 앞선다(communion before commission). 그러나 후기 근대인은 교제를 잊고 자기 의미를 생산성과 효율, 성취로 환원해 버렸다.
이번 칼럼에서 왓킨은 시편 8편을 편다. 5절의 주어를 보라. "주께서 그들에게 관을 씌우셨다." 그들이 스스로 관을 쓴 것이 아니다. 관을 얻어낸 것도, 최적화로 영광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존엄은 성과나 지성, 생산성, 아름다움, 온라인의 인정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피조물 됨을 인정하지 않으면 면류관도 없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다. 이 근거의 자리를 바꿀 때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경쟁자가 되고, 그 자리를 지킬 때 AI는 인간의 부르심을 확장하는 도구가 된다.
왓킨의 통찰 중 목회적으로 가장 뼈아픈 대목은 이것이다. 2025년 AI의 최상위 사용처는 무엇이었나.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보고서에 따르면 '치료와 동반자 관계'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알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를 원한다. 정보가 아니라 친밀함을 원한다. 그 갈망이 너무 깊어서, 상대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언어 예측 기계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거기서 친밀함을 구한다.
실천의 결이 여기서 갈린다. 첫째, 우리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얻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알고 있느냐로 자기를 규정하는가. 둘째, 우리는 답을 얻는 속도를 지혜라 착각하지 않는가. 셋째, 우리는 기계의 조언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공동체의 자리보다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한국 교회는 이 물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강단은 이미 챗봇이 정리한 개요와 경쟁하고, 목양은 즉답을 요구하는 세대와 마주하며, 교회 학교는 아이들의 손 안에서 자라는 새로운 스승과 부딪친다. TGC 산하 켈러 문화변증센터는 이 시리즈와 함께 "AI 시대를 준비하라"(Get Ready for the Age of AI)라는 6주 과정 코호트를 8월 12일부터 9월 16일까지 운영하며, AI가 인간성을 어떻게 재형성하는지, 그리스도인이 인간됨을 어떻게 붙들 수 있는지를 다룬다. AI가 작성한 목회 서신과 심방 커뮤니케이션이 사례 연구로 포함되어 있다. 서구 교회가 이 질문을 제도적 훈련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신호다.
왓킨의 팟캐스트는 답을 다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물음의 무게를 바로 잡아준다. 문제는 AI가 얼마나 똑똑해지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어디에서 자기 존엄을 찾느냐다.
복음은 이 물음에 오래된 답을 다시 내민다. 왓킨의 결론도 같은 자리로 수렴한다. 지성과 권력과 성취 위에 세운 근대의 성냥개비 저택에 안주하지 말라. 자신을 낮추고, 우주의 하나님이 높여 주시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주권적 노예의 감옥 문을 여시게 하고, 자유인으로 걸어 나오라. 당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임을 알라. 면류관을 받으라. 어떤 에이전트도, 어떤 챗봇도 빼앗을 수 없는 영광과 존귀가 거기에 있다.
사람은 지성으로 왕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 된다. 왕은 그분이시고, 그 왕 아래에서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자녀로 자유하다.